
설계자의 역할과 업무
제품의 의도를 현실의 조건 속에서 설명 가능한 판단으로 바꾸는 일
설계자의 하루는 하나의 작업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어떤 날은 고객의 요구를 다시 읽는 데 시간을 쓴다.
어떤 날은 브라켓 하나의 두께를 두고 오래 고민한다.
어떤 날은 조립자가 손을 넣을 공간이 부족해 전체 배치를 다시 본다.
어떤 날은 가공업체가 “이 형상은 만들기 어렵다”고 말해 오고, 어떤 날은 구매품 하나가 단종되어 이미 정리된 구조를 다시 흔든다.
겉으로 보면 설계자는 CAD 앞에 앉아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모델을 만들고, 도면을 그리고, 치수를 넣고, BOM을 정리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틀린 말은 아니다.
설계자는 실제로 그렇게 일한다.
그러나 설계자의 일을 CAD 작업이나 도면 작성으로만 설명하면 많은 것이 빠진다.
설계자의 일은 화면 안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고객의 말 속에서도 시작되고, 현장의 불편함 속에서도 드러난다.
도면의 기준과 공차 안에서 구체화되고, 제작과 조립과 검사 과정에서 다시 확인된다.
그래서 설계자의 일은 하나의 작업이라기보다 여러 조건 사이를 오가며 판단을 정리하는 흐름에 가깝다.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가.
왜 그렇게 만들어야 하는가.
무엇은 반드시 지켜야 하고, 무엇은 조정 가능한가.
어떤 구조가 기능을 가장 안정적으로 실현하는가.
어디를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가.
어느 정도의 변동은 허용할 수 있는가.
실제로 만들 수 있는가.
조립자는 이 구조를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가.
검사자는 같은 기준으로 품질을 확인할 수 있는가.
변경이 생기면 무엇이 함께 흔들리는가.
설계자는 이 질문들을 지나가며 제품을 현실로 옮긴다.
따라서 설계자의 일을 이해하려면 세 가지를 함께 보아야 한다.
첫째, 설계자의 역할이다.
설계자가 제품 개발 과정에서 어디에 서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둘째, 설계자의 업무다.
그 위치에서 설계자가 실제로 무엇을 판단하고, 무엇을 만들고, 무엇을 남기는지를 보는 것이다.
셋째, 설계자의 책임이다.
설계자가 제품 개발과 생산 과정에서 어디까지 설명하고 책임져야 하는지를 보는 것이다.
역할이 없으면 업무는 단순 작업이 된다.
업무가 없으면 역할은 추상적인 말에 머문다.
책임의 경계가 없으면 설계자는 제품 전체의 문제를 혼자 떠안는 사람처럼 보인다.
설계자의 일은 이 셋이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선명해진다.
1. 설계자의 역할은 제품의 중심 의도를 잡는 것이다.
설계자는 많은 사람과 만난다.
고객의 요구를 듣는다.
영업의 납기 이야기를 듣는다.
구매의 부품 수급 문제를 듣는다.
가공업체의 제작 가능성을 확인한다.
조립자의 불편함을 듣는다.
검사자의 측정 기준을 확인한다.
품질 문제의 원인을 함께 찾는다.
이렇게 보면 설계자는 제품 개발 전체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는 맞다.
설계자는 제품의 형상과 구조를 정의한다.
그리고 그 정의는 제조와 조립과 검사와 품질에 영향을 준다.
하지만 중심에 있다는 말이 모든 일을 대신한다는 뜻은 아니다.
설계자는 가공자가 아니다.
조립자가 아니다.
검사자가 아니다.
구매 담당자도 아니고, 생산관리자도 아니다.
각각의 일에는 각각의 전문성이 있다.
가공자는 실제 절삭과 세팅의 감각을 안다.
조립자는 도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작업의 불편함을 안다.
검사자는 측정이 말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구매자는 부품 하나의 납기와 공급 안정성이 제품 전체를 흔들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설계자는 이들을 대신할 수 없다.
그리고 대신하려 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설계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설계자의 역할은 제품의 중심 의도를 잡는 것이다.
제품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조건을 만족해야 하는지, 무엇은 바뀌어도 되고 무엇은 바뀌면 안 되는지를 정리하는 것이다.
가공자는 어떤 면을 기준으로 잡아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조립자는 무엇을 기준으로 맞춰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검사자는 무엇을 측정해야 기능을 보증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구매자는 어떤 조건은 대체 가능하고, 어떤 조건은 반드시 유지되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이 기준과 관계를 설계자가 정의해야 한다.
따라서 설계자의 역할은 통제가 아니다.
연결이다.
모든 일을 직접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각 일이 같은 제품 의도 안에서 이어지도록 기준을 세우고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다.
좋은 설계자는 현장을 지배하지 않는다.
좋은 설계자는 현장과 대화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
2. 설계자는 요구와 현실 사이의 번역자다.
설계의 시작은 대개 명확하지 않다.
고객은 처음부터 완성된 설계 조건을 주지 않는다.
대부분은 불편함, 기대, 비용, 납기, 감각을 섞어 말한다.
“조립이 쉬웠으면 좋겠습니다.”
“세척이 편해야 합니다.”
“기존 장비보다 작았으면 합니다.”
“가격은 낮춰야 합니다.”
“정밀도가 중요합니다.”
“현장에서 자꾸 문제가 납니다.”
이 말들은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그대로 도면 위에 옮길 수는 없다.
“조립이 쉽다”는 말은 부품 방향, 공구 접근성, 체결 순서, 작업 공간, 임시 고정 방식의 문제로 바뀌어야 한다.
“세척이 편하다”는 말은 틈새, 배수성, 표면 거칠기, 분해성, 잔류물 방지 구조의 문제로 바뀌어야 한다.
“정밀도가 중요하다”는 말은 어느 기능 관계가 정밀해야 하는지로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가격을 낮춰야 한다”는 말은 재료, 공정, 부품 수, 표준품 사용, 외주 가능성의 문제로 바뀌어야 한다.
설계자는 고객의 말을 그대로 형상으로 옮기는 사람이 아니다.
고객의 말을 설계 가능한 조건으로 바꾸는 사람이다.
현장의 말도 마찬가지다.
“가공이 어렵다.”
“조립이 불편하다.”
“측정하기 어렵다.”
“납기가 너무 길다.”
“불량이 반복된다.”
이 말들이 단순한 불평으로 남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설계자는 그 말 안에 숨어 있는 구조적 이유를 찾아야 한다.
가공이 어려운 이유가 형상 때문인지, 공차 때문인지, 기준면 때문인지, 세팅 때문인지 보아야 한다.
조립이 불편한 이유가 방향성 때문인지, 공구 접근성 때문인지, 임시 고정이 없기 때문인지 확인해야 한다.
측정이 어려운 이유가 검사 기준이 불명확해서인지, datum이 불안정해서인지, 지그가 필요해서인지 살펴야 한다.
설계자는 요구와 현실 사이에 있다.
한쪽에는 고객의 언어가 있다.
다른 한쪽에는 제조와 조립과 검사의 언어가 있다.
설계자의 중요한 역할은 이 둘을 제품의 언어로 바꾸는 것이다.
이 번역이 잘되면 설계는 안정된다.
이 번역이 약하면 설계는 나중에 반복적으로 흔들린다.
3. 설계자의 업무는 판단의 흐름으로 진행된다.
역할이 제품의 중심을 잡는 것이라면, 업무는 그 중심을 실제 정보로 만드는 과정이다.
설계자의 업무는 단순히 순서대로 처리되는 작업 목록이 아니다.
실제 설계는 앞으로만 가지 않는다.
요구를 정리하다가 기능이 바뀐다.
기능을 나누다가 구조가 바뀐다.
구조를 잡다가 부품 분할이 바뀐다.
형상을 만들다가 제조성 문제로 다시 구조를 바꾼다.
공차를 정하다가 기준면을 다시 잡는다.
조립 검토 중에 전체 배치를 수정한다.
설계는 직선이 아니다.
설계는 반복되는 판단의 흐름이다.
그 흐름은 크게 다섯 가지로 볼 수 있다.
요구를 읽는 일.
구조를 만드는 일.
형상을 제품 정보로 고정하는 일.
현실에서 확인하는 일.
정보를 넘기고 다시 배우는 일.
이 다섯 가지 흐름 안에 설계자의 구체적인 업무가 들어 있다.
4. 요구를 읽는 일
설계자의 업무는 요구를 받아 적는 데서 시작하지 않는다.
요구를 설계 조건으로 바꾸는 데서 시작한다.
무엇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가.
무엇은 조정 가능한가.
무엇은 아직 모르는가.
무엇은 수치로 확인해야 하는가.
무엇은 기능 요구인가.
무엇은 원가 요구인가.
무엇은 사용 편의성의 문제인가.
무엇은 제조와 조립의 제약인가.
이 업무에서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모든 답을 아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아직 모르는지 구분하는 것이다.
설계가 흔들리는 이유는 답을 몰라서만이 아니다.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른 채 형상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흔들린다.
요구 정리는 설계를 늦추는 일이 아니다.
뒤에서 생길 불필요한 수정과 혼란을 줄이는 일이다.
요구가 정리되면 설계자는 기능을 나눈다.
제품은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러 기능의 조합이다.
지지하는 기능, 움직이는 기능, 고정하는 기능, 전달하는 기능, 조정하는 기능, 보호하는 기능, 측정하는 기능이 서로 얽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장비에 상하 이동 기능이 필요하다고 하자.
이때 설계자는 바로 브라켓을 그리기 전에 먼저 구조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무엇이 움직이는가.
무엇이 고정되는가.
하중은 어디로 전달되는가.
위치는 어떻게 반복되는가.
구동은 모터로 할 것인가, 실린더로 할 것인가.
가이드는 한쪽에 둘 것인가, 양쪽에 둘 것인가.
조정이 필요한 구조인가, 조정 없이 조립되어야 하는 구조인가.
이 질문들은 아직 상세 형상 이전의 질문이다.
그러나 제품의 방향을 크게 결정한다.
기능을 나누지 않고 바로 형상으로 들어가면 설계는 빨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형상이 왜 필요한지, 어떤 기능을 담당하는지, 어느 부분이 바뀌면 안 되는지 알기 어려워진다.
설계자는 기능을 부품으로 바로 바꾸는 사람이 아니다.
먼저 기능의 관계를 본다.
무엇이 움직이고, 무엇이 지지하고, 무엇이 기준이 되고, 무엇이 힘을 전달하는지 보아야 한다.
그 관계가 정리되어야 형상은 의미를 갖는다.
5. 구조를 만드는 일
기능이 나뉘면 구조를 잡아야 한다.
구조를 잡는다는 것은 제품의 뼈대를 정하는 일이다.
어떤 부품이 중심이 되고, 어떤 부품이 움직이며, 어떤 부품이 하중을 받고, 어떤 방향으로 조립될지를 정하는 일이다.
이 단계는 조용하지만 중요하다.
완성된 제품을 보면 초기 구조 결정의 흔적은 잘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제품의 사용성, 제조성, 조립성, 유지보수성은 이 단계에서 상당 부분 결정된다.
좋은 구조는 이후의 상세 설계를 편하게 만든다.
나쁜 구조는 이후의 모든 일을 어렵게 만든다.
공구가 들어가지 않는다.
조립 순서가 꼬인다.
기준면을 잡기 어렵다.
부품을 교체하기 어렵다.
센서나 케이블이 갈 곳이 없다.
검사자가 측정할 위치를 잡기 어렵다.
이런 문제는 대부분 상세 형상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초기 구조와 배치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
구조 배치는 단순히 빈 공간에 부품을 넣는 일이 아니다.
제품 안에서 기능과 작업이 지나갈 길을 정하는 일이다.
하중이 지나갈 길.
운동이 일어날 공간.
작업자의 손이 들어갈 공간.
공구가 접근할 공간.
배선과 배관이 지나갈 공간.
점검과 유지보수를 위한 공간.
조립자가 부품을 넣고 빼는 공간.
검사자가 기준을 잡고 측정할 공간.
설계자는 부품만 배치하는 사람이 아니다.
작업과 유지보수와 검사가 들어갈 자리까지 함께 배치해야 한다.
구조를 잡고 나면 또 하나의 판단이 따라온다.
무엇을 하나로 만들고, 무엇을 나누어 만들 것인가.
하나의 부품으로 만들면 강성이 좋아질 수 있다.
정렬이 안정되고, 조립 부품 수가 줄어들 수 있다.
하지만 가공이 어려워지고, 재료비가 올라가며, 불량이 났을 때 손실이 커질 수 있다.
반대로 여러 부품으로 나누면 가공이 쉬워질 수 있다.
외주가 편하고, 유지보수도 쉬워질 수 있다.
하지만 조립 공수가 늘고, 체결부가 생기며, 공차 누적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 문제에는 하나의 정답이 없다.
복잡한 형상이라고 해서 항상 나쁜 설계는 아니다.
단순한 형상이라고 해서 항상 좋은 설계도 아니다.
4축이나 5축 가공을 사용할 수 있고, 세팅이 안정적이며, 수량과 원가가 맞는다면 복잡한 일체형 구조가 더 나을 수 있다.
반대로 일반적인 3축 가공이나 판금, 용접 중심의 조건이라면 분할 구조가 더 현실적일 수 있다.
설계자는 형상의 복잡함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 형상을 어떤 공정에서, 어떤 수량으로, 어떤 비용으로,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한다.
부품을 나누는 일은 단순한 분할이 아니다.
제품을 어떤 단위로 만들고, 조립하고, 검사하고, 교체할 것인지 정하는 일이다.
6. 형상을 제품 정보로 고정하는 일
구조가 잡히면 형상이 만들어진다.
설계자는 CAD 안에서 부품을 만들고, 두께를 정하고, 구멍을 배치하고, 리브를 추가하고, 간섭을 피하고, 재료와 표면 처리를 정한다.
이 단계는 가장 눈에 잘 보이는 설계 업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설계를 형상 작성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형상 설계는 단순히 보기 좋은 모양을 만드는 일이 아니다.
형상은 기능과 현실 조건이 만나는 결과다.
어떤 형상은 하중 때문에 필요하고, 어떤 형상은 가공 때문에 필요하며, 어떤 형상은 조립 때문에 필요하다.
어떤 형상은 청소나 유지보수 때문에 필요하고, 어떤 형상은 검사 기준을 잡기 위해 필요하다.
좋은 형상에는 이유가 있다.
이 두께는 왜 필요한가.
이 리브는 왜 필요한가.
이 구멍 위치는 무엇을 기준으로 정했는가.
이 면은 왜 가공해야 하는가.
이 공간에는 어떤 공구가 들어가는가.
이 모서리는 작업자에게 안전한가.
이 부품은 손으로 잡고 조립할 수 있는가.
이 형상은 불필요하게 복잡하지 않은가.
구멍 하나도 그렇다.
그 구멍이 단순 체결용인지, 위치 결정용인지, 조정용 장공인지, 검사 기준과 연결되는 구멍인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같은 구멍처럼 보여도 설계자의 판단은 다르다.
그러나 형상만으로는 부족하다.
CAD 모델은 이상적인 형상이다.
현실의 제품은 항상 조금씩 다르다.
가공하면 치수가 달라진다.
용접하면 변형이 생긴다.
조립하면 누적 오차가 생긴다.
측정하면 측정 방법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기준과 공차가 필요하다.
설계자는 어느 면을 기준으로 볼지 정해야 한다.
어느 치수가 기능에 중요한지 정해야 한다.
어느 정도의 변동까지 허용할 수 있는지 판단해야 한다.
모든 치수를 엄격하게 만들면 원가는 올라간다.
모든 치수를 느슨하게 두면 기능이 흔들린다.
좋은 설계는 이 둘 사이에서 중요한 관계를 찾아 고정하고, 중요하지 않은 부분에는 제조의 자유를 주는 것이다.
공차는 가공 오차를 허용하는 숫자가 아니다.
기능이 유지되는 변동의 경계다.
datum도 단순한 측정 기준이 아니다.
부품이 현실에서 어떻게 잡히고, 조립되고, 검사될 것인지를 정하는 기준이다.
이 판단이 약하면 도면은 있어도 제품은 흔들린다.
치수는 있지만 기준이 없고, 공차는 있지만 기능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형상, 기준, 공차가 정리될 때 설계는 비로소 제품 정보가 된다.
7. 현실에서 확인하는 일
설계는 화면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
형상이 만들어졌다면 질문은 바뀐다.
이것을 만들 수 있는가.
조립할 수 있는가.
검사할 수 있는가.
반복해서 만들어도 같은 의미를 유지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설계자를 현장으로 끌고 간다.
그렇다고 설계자가 제조자, 조립자, 검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설계자는 적어도 자신이 만든 구조가 그들의 작업 안에서 무리 없이 해석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제조 가능성은 단순히 “만들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조건에서, 어떤 비용으로,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느냐의 문제다.
어떤 공장에서는 어려운 구조가 다른 공장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수량에서는 비싼 방식이 다른 수량에서는 더 경제적일 수 있다.
어떤 일체형 구조는 한 번의 세팅으로 정밀도를 확보할 수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분할 구조가 훨씬 안정적일 수 있다.
조립성도 마찬가지다.
부품 방향을 헷갈리지 않는가.
공구가 들어가는가.
손이 들어가는가.
조립 순서가 자연스러운가.
임시 고정이 가능한가.
무리한 힘을 주지 않아도 조립되는가.
잘못 조립하기 어려운 구조인가.
검사성도 함께 보아야 한다.
기준면을 안정적으로 잡을 수 있는가.
측정 가능한 공차인가.
검사 기준과 실제 기능 기준이 연결되어 있는가.
검사 지그가 필요한가.
반복 측정해도 같은 결과가 나오는가.
합격과 불합격의 기준이 명확한가.
제조와 조립과 검사는 설계가 끝난 뒤 누군가 알아서 해결하는 일이 아니다.
설계 단계에서 미리 확인해야 하는 현실 조건이다.
설계자는 모든 답을 혼자 내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좋은 설계자는 필요한 시점에 가공자, 조립자, 검사자에게 물어볼 줄 안다.
중요한 것은 설계가 현실의 작업과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8. 정보를 넘기고 다시 배우는 일
제품 정보는 누군가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제조자는 도면을 보고, 구매자는 BOM을 보고, 조립자는 조립 구조를 보고, 검사자는 검사 기준을 본다.
이때 설계 정보가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각 부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제품을 이해하게 된다.
도면과 BOM은 단순 행정 자료가 아니다.
제품 정보를 다른 부서가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한 결과물이다.
도면은 제조와 검사의 기준을 전달한다.
BOM은 제품이 어떤 부품으로 구성되는지 보여준다.
BOM은 단순한 부품 목록이 아니다.
제품 구조를 관리하는 중요한 설계 정보다.
어떤 부품을 제작할 것인가.
어떤 부품을 구매할 것인가.
어떤 부품을 표준품으로 쓸 것인가.
어떤 부품은 공용화할 수 있는가.
대체품은 허용되는가.
소모품과 유지보수 부품은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조립 단위는 어떻게 나눌 것인가.
이 정보가 불명확하면 구매, 조립, 원가, 납기가 흔들린다.
출도는 단순히 파일을 넘기는 일이 아니다.
제품을 다음 단계로 보내는 공식적인 행위다.
도면과 BOM이 잘 정리되어 있다는 것은 단지 문서가 깔끔하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같은 제품을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설계 정보가 제대로 전달될 때, 설계자의 판단은 비로소 조직의 작업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설계는 출도에서 완전히 끝나지 않는다.
시제품에서 문제가 발견된다.
외주 업체가 가공이 어렵다고 말한다.
구매품이 단종된다.
조립자가 불편함을 말한다.
검사 기준이 모호하다는 피드백이 온다.
고객 요구가 바뀐다.
그래서 설계 변경이 발생한다.
변경은 단순히 CAD 파일을 수정하는 일이 아니다.
변경에는 이유가 있고, 영향이 있다.
왜 바꾸는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인가.
어느 부품에 영향을 주는가.
조립에는 영향이 없는가.
검사 기준은 그대로 유지되는가.
기존 재고를 사용할 수 있는가.
고객 승인이나 내부 승인이 필요한가.
이런 내용이 남아야 설계가 기억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그리고 변경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 변경에서 무엇을 배웠는가이다.
왜 이 구조는 문제가 되었는가.
왜 이 공차는 너무 빡빡했는가.
왜 이 기준면은 실제 검사에서 불안정했는가.
왜 이 부품 분할은 조립을 어렵게 만들었는가.
다음 설계에서는 무엇을 다르게 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이 남아야 설계 경험은 다음 설계의 기준이 된다.
경험은 중요하다.
하지만 경험이 머릿속에만 있으면 개인의 감각으로 끝난다.
좋은 설계 조직은 경험을 판단 기준으로 바꾼다.
왜 그렇게 했는지, 어떤 조건에서 유효했는지, 어떤 실패를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는지를 남긴다.
설계자의 업무는 이번 제품을 완성하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이번 설계에서 얻은 판단이 다음 설계에서 다시 사용될 수 있도록 남기는 데까지 이어진다.
9. 설계자의 주요 업무를 정리하면
설계자의 업무는 다양하지만, 핵심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흐름 | 구체적인 업무 | 설계자가 판단하는 것 |
|---|---|---|
요구를 읽는 일 | 요구 정리 | 고객의 말을 어떤 설계 조건으로 바꿀 것인가 |
요구를 읽는 일 | 기능 분해 | 제품이 해야 할 일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
구조를 만드는 일 | 구조 배치 | 부품, 공간, 하중, 작업 흐름을 어떻게 놓을 것인가 |
구조를 만드는 일 | 부품 분할 | 무엇을 하나로 만들고 무엇을 나눌 것인가 |
제품 정보로 고정하는 일 | 형상 설계 | 기능과 현실 조건을 어떤 형상으로 만들 것인가 |
제품 정보로 고정하는 일 | 기준·공차 정의 | 무엇을 기준으로 삼고 어느 변동까지 허용할 것인가 |
현실에서 확인하는 일 | 제조성 확인 | 실제 공정에서 무리 없이 만들 수 있는가 |
현실에서 확인하는 일 | 조립·검사 확인 | 작업자와 검사자가 안정적으로 다룰 수 있는가 |
정보를 넘기는 일 | 도면·BOM 정리 | 다른 부서가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가 |
다시 배우는 일 | 변경·경험 관리 | 무엇이 바뀌었고 무엇을 배웠는가 |
이 표는 설계 업무를 고정된 순서로 묶기 위한 것이 아니다.
실제 설계는 언제든 되돌아간다.
요구가 바뀌면 기능이 바뀐다.
기능이 바뀌면 구조가 바뀐다.
구조가 바뀌면 형상과 공차가 바뀐다.
제조성 검토에서 문제가 나오면 다시 부품을 나누어야 할 수도 있다.
검사 기준이 흔들리면 datum을 다시 잡아야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설계 업무는 절차라기보다 판단의 순환에 가깝다.
10. 책임: 설계자는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여기까지 읽으면 설계자의 일이 꽤 넓어 보인다.
요구를 읽고, 기능을 나누고, 구조를 잡고, 형상을 만들고, 기준과 공차를 정한다.
제조와 조립과 검사의 현실성을 확인하고, 도면과 BOM으로 정보를 넘기며, 변경과 경험을 다시 다음 판단의 기준으로 남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생긴다.
설계자는 이 모든 과정에 대해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이 질문은 매우 현실적이다.
현장에서는 문제가 생겼을 때 자주 설계로 돌아온다.
가공이 안 되어도 설계 문제라고 한다.
조립이 어려워도 설계 문제라고 한다.
검사 기준이 애매해도 설계 문제라고 한다.
구매품이 맞지 않아도 설계 문제라고 한다.
생산 중 불량이 나도 설계 문제라고 한다.
물론 그중 일부는 실제로 설계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문제가 설계자의 단독 책임은 아니다.
설계자의 역할을 넓게 이해하는 것과, 설계자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다르다.
설계자는 제품 개발의 중심에 있지만, 제품 개발 전체를 혼자 책임지는 사람은 아니다.
제품은 여러 전문 영역이 함께 만드는 결과다.
따라서 책임도 함께 나뉘어야 한다.
설계자는 설계 정의의 책임을 진다.
제조자는 제조 공정과 제작 품질의 책임을 진다.
조립자는 조립 기준과 작업 품질의 책임을 진다.
검사자는 측정과 판정의 책임을 진다.
구매자는 사양에 맞는 부품 조달의 책임을 진다.
품질 부서는 반복 불량과 품질 체계의 책임을 진다.
프로젝트 책임자는 일정, 비용, 의사결정의 균형을 책임진다.
이 구분이 무너지면 설계자는 무한책임의 자리에 놓인다.
그리고 그 순간 설계자의 역할은 정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흐려진다.
설계자가 책임져야 할 것은 모든 결과가 아니다.
설계자가 책임져야 할 것은 자신이 정의한 설계 정보와 판단이다.
11. 설계자의 책임은 설계 정의에 대한 책임이다
설계자의 책임은 무한책임이 아니다.
설계자의 책임은 설계 정의에 대한 책임이다.
즉 설계자는 자신이 정한 구조, 형상, 기준, 공차, 재료, 부품 구성, 도면, BOM, 변경 내용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또 그 설계 정보가 제품의 요구 기능과 실제 조건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설계자가 직접 통제하지 않은 모든 제조 결과, 모든 조립 문제, 모든 구매 문제, 모든 품질 문제까지 단독으로 책임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도면에는 명확한 기준과 공차가 있었는데, 가공 과정에서 다른 기준으로 세팅하여 불량이 났다면 그것은 설계자의 단독 책임이라고 보기 어렵다.
반대로 도면에 기준이 불명확해서 가공자가 임의로 기준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면, 그것은 설계자가 다시 보아야 할 문제다.
도면에는 측정 기준이 명확했는데, 검사 과정에서 다른 방식으로 측정하여 문제가 생겼다면 검사 과정의 문제일 수 있다.
반대로 검사 가능한 기준을 설계자가 제시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설계 정의의 문제다.
구매품 사양이 명확했는데 다른 사양의 부품이 들어왔다면 구매 또는 승인 과정의 문제일 수 있다.
반대로 설계자가 필요한 사양을 충분히 정의하지 않았다면 설계 책임이 있다.
이렇게 보면 설계자의 책임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설계자는 자신이 정의한 것에 책임이 있다.
설계자는 정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혼란에도 책임이 있다.
설계자는 검토했어야 할 조건을 놓친 경우에도 책임이 있다.
하지만 설계자가 명확히 정의했고, 그 정의와 다르게 실행된 문제까지 모두 설계자의 단독 책임은 아니다.
이 구분이 중요하다.
설계자의 책임은 모든 결과를 혼자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제품이 같은 의미로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필요한 설계 정보를 명확히 정의하는 것이다.
무겁지만 무한하지 않다.
넓지만 경계가 있다.
설계자의 역할과 업무와 책임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역할은 설계자가 제품 개발 안에서 어디에 서 있는지를 말한다.
업무는 그 자리에서 무엇을 판단하고 무엇을 남기는지를 말한다.
책임은 그 판단과 산출물이 제품의 기능과 현실 조건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지 설명할 수 있는지를 말한다.
따라서 설계자의 책임은 제품 전체를 혼자 짊어지는 것이 아니다.
제품 전체가 같은 의미로 움직일 수 있도록 설계의 기준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설계자는 자신의 판단과 정의에 대해 책임을 진다.
다른 부서는 각자의 실행과 관리에 대해 책임을 진다.
제품은 이 책임들이 서로 연결될 때 안정적으로 만들어진다.
설계자의 책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 | 설계자의 책임 |
요구 해석 | 요구사항을 설계 조건으로 바르게 해석했는가 |
기능 정의 | 제품이 해야 할 기능을 구조에 반영했는가 |
형상 정의 | 형상이 기능, 제조, 조립 조건을 반영하고 있는가 |
기준·공차 | 기능에 필요한 기준과 허용 변동을 명확히 정의했는가 |
제조성 검토 | 합리적인 범위에서 제작 가능성을 확인했는가 |
조립성 검토 | 조립 방향, 접근성, 작업성을 고려했는가 |
검사성 검토 | 측정 가능한 기준과 판정 조건을 제시했는가 |
제품 정보 | 도면, BOM, 사양이 명확하고 일관적인가 |
변경 관리 | 변경 이유와 영향 범위를 확인했는가 |
피드백 반영 | 반복 문제를 다음 설계 기준으로 되돌려 보았는가 |
이 표는 설계자에게 더 많은 책임을 지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책임의 경계를 명확히 하기 위한 것이다.
설계자가 책임져야 할 것은 자신이 정의한 설계 의도, 설계 정보, 설계 판단이다.
그리고 그 판단이 다른 사람에게 같은 의미로 전달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설계자의 책임이다.
12. 결론: 설계자는 제품의 의도를 설명 가능한 판단으로 남기는 사람이다
설계자의 역할은 제품의 의도와 현실의 조건을 연결하는 것이다.
설계자의 업무는 그 연결을 실제 정보로 남기는 것이다.
설계자의 책임은 그 정보가 제품의 기능과 현실 조건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지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요구를 조건으로 바꾸고.
조건을 기능으로 나누고.
기능을 구조로 만들고.
구조를 형상으로 정리하고.
형상을 기준과 공차로 고정하고.
제조와 조립과 검사의 현실성을 확인하고.
도면과 BOM으로 전달하고.
변경과 경험을 다음 판단의 기준으로 남기는 것.
이 흐름이 설계자의 역할과 업무를 설명한다.
그러나 이 흐름이 설계자의 무한책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설계자는 제품을 개발하는 모든 사람의 일을 대신하지 않는다.
설계자는 모든 제조 문제와 모든 생산 문제의 단독 책임자가 아니다.
설계자는 자신이 정의한 설계 의도, 설계 정보, 설계 판단에 책임을 진다.
그리고 그 판단이 다른 사람에게 같은 의미로 전달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설계자는 제품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다.
제품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판단을 남기는 사람이다.
그 판단이 쌓이면 도면이 된다.
그 판단이 정리되면 기준이 된다.
그 판단이 반복되면 설계 문화가 된다.
그 판단이 다음 사람에게 전달되면 조직의 설계 능력이 된다.
따라서 설계자의 역할과 업무와 책임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설계자는 제품의 의도를 현실의 조건 속에서 반복 가능하고 설명 가능한 판단으로 바꾸는 사람이다.
이 문장 안에는 역할과 업무와 책임이 함께 들어 있다.
제품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은 역할이다.
현실의 조건을 읽고 정보로 만드는 것은 업무다.
그 판단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책임이다.
좋은 설계는 이 셋이 끊어지지 않을 때 만들어진다.